홈페이지PDF파일지난호보기

기업윤리
브리프스

2018년
07월호

사례돋보기

워라밸, 행복한 워커

크런치(Crunch). ‘아작아작 씹다, 깨물어 부수다‘라는 뜻의 영단어다. 명사로 쓰이면 ’위기, 긴장‘이라는 의미가 되고 크런치 타임(Crunch Time)이라는 숙어가 되면 ’극도의 긴장이 필요한 때‘라는 뜻으로 쓰인다. 단어의 의미를 알면 게임업계 종사자가 아니라도 <'크런치 모드'에 죽어가는 개발자들>, <N게임사 직원 89시간 크런치 모드로 사망>이라는 기사 헤드라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크런치 모드란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회사 차원에서 장기간 야근과 주말근무를 의무화하는 기간을 의미한다. 살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고인은 20대의 젊은 개발자였다. 발병 4주 전에는 주당 78시간, 발병 7주 전에는 주당 89시간이라는 초장시간 노동을 감당한 그의 사인은 급성심근경색이었다. 죽도록 일하다간 정말로 죽는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경쟁이 치열한 게임업계에서 크런치 모드 운용은 필요악이라는 주장도 있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올인’해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노동 생산성은 35개 OECD 국가 중 28위에 그치고 있다. 초고령 국가인 일본과 비교해 봐도 77%에 불과하다. 개인의 삶을 통째로 일에 내던졌음에도 생산성은 하위권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정부는 한국 사회 특유의 과로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 등 여러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기업문화 혁신을 유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기업 스스로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솔루션을 개발해 실천할 때야말로 업무 생산성과 삶의 질이 함께 나아질 수 있는 것이다.

◎ 대기업, 워라밸을 위한 시스템 구축

많은 기업들이 노동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도구 개발에 힘쓰고 있다. 무의미한 장시간 노동은 임직원들의 창의성과 생산성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스마트워크 관련 최근 국내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들의 80%가 효율적인 업무 환경을 위해서는 스마트워크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가장 필요한 것으로는 모바일 및 클라우드 프린트 등 ‘모바일로 연결된 사무실 환경 구축’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 즉 업무의 연속성과 효율성이 노동 생산성을 고취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조직의 문제점은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조직은 점차 더 큰 폭력을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커다란 리스크로 돌아오게 된다.

과감하고 철저한 시스템의 변화, J사

일본의 조미료회사인 J사는 세계 최초의 인공 조미료를 선보인 조미료 시장의 왕자다. J사는 작년 4월 도전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잔업 없는 하루 7시간 근무제를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기업문화가 우리나라 이상으로 특근과 잔업을 중시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주 획기적인 실험이었다.

J사가 근무시간 단축에 나선 배경은 명확하다. 현재 일본식 근무 행태로는 해외 인재 유치가 어렵고 글로벌 경쟁력 확보가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니시이 다카아키 사장의 과감한 개혁 드라이브에는 그가 몸소 체득한 경험이 깔려있다. 2013년 브라질 본사에서 근무할 때 젊은 사원들이 자율 근무를 통해 업무 효율을 높이는 것을 본 것이다.

J사는 2020년까지 하루 7시간 근무제의 안정적인 정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시간당 성과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인사고과 기준을 재편하였고, 나아가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재택근무 제도를 도입했다. 1,100여 명의 관리자들은 의무적으로 일주일에 하루는 집에서 근무해야 한다. 유명무실한 제도가 되지 않도록 회사가 의지를 갖고 노력하는 것이다. 아울러 단순히 의지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총 10억 엔을 투자하여 새로운 컴퓨터와 정보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다. 회사 밖에서 근무하는 종업원들이 늘어나자 정보보안을 위한 선제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J사는 과감한 개혁에 뒤따르게 될 리스크를 줄이고, 자율근무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정착하도록 중장기 계획을 단계적으로 철저히 실행해 나가고 있다.

퇴근시간 지나면 자동으로 꺼지는 PC, T기업

올해 4월, T기업은 정부가 추진 중인 주 52시간 근무제를 조기 도입했다. 이를 정착시키기 위해 시차출퇴근제와 PC 오프제를 동시에 시행했다. 직원들은 오전 8시부터 10시 30분까지 30분 단위로 본인의 출근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 개인의 상황에 맞는 유연한 근태관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제도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이다. 출근시간을 9시 30분으로 지정한 직원은 일찍 출근해봤자 근무할 수가 없다. 9시 반 이전엔 PC가 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퇴근할 때도 마찬가지다. 컴퓨터 화면에는 6시 25분부터 종료를 예고하는 초시계가 나타나고 6시 30분이 되면 자동으로 전원이 꺼진다. 직원 입장에서도 시간당 업무 생산성을 올려야만 하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예전에도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종국엔 흐지부지되어 이름만 남았다. 상사들이 모범을 보이지 않았거나 직원들이 눈치를 보았고,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도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T기업은 PC 오프제라는 명시적이며 강력한 제도를 실제 업무현장에 정착시키기 위해 고유의 시스템까지 개발한 것이다.

◎ 중소기업, 직원 중심 문화 정착

글로벌 금융위기와 SNS의 발전을 모두 겪으며 현실적이고 신중한 세대로 자라난 밀레니얼 세대가 노동인구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 실업률은 매년 최악을 갱신하지만 중소기업의 구인난은 날로 심화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대기업과 같은 수준의 급여 지급이 어려운 중소기업들은, 인재 영입을 위해 색다른 형태의 보상 제도를 내놓고 있다. 우수한 젊은 인재들이 열망하는 워라밸이 가능한 기업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주 4.5일제, M사

M사는 국내 휴대용 마사지기 1위 브랜드를 보유한 헬스&뷰티 전문 기업이다. M사의 직원들은 9시 혹은 9시 30분 중 하나를 선택해 출근할 수 있다. 월요병 퇴치를 위해 월요일에는 모두 10시에 출근하고 있으며 매주 금요일은 오후 1시에 퇴근한다. 주5일이 아니라 주 4.5일 근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직원들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에 조기 퇴근함으로써 휴식의 질이 더욱 높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뿐만 아니라 직원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회사에 대해서도 충성도가 높아졌다고 말한다.

M사 대표는 이러한 직원중심 근태제도를 도입한 이유로 기업 경쟁력 강화를 꼽았다. 마사지기 등 다양한 힐링 용품을 개발, 공급해 소비자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게 M사의 비즈니스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직원들이 먼저 양질의 휴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진정한 휴식과 개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다양한 복지 제도를 고민 중이라고 한다. 돈보다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청년 구직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일터가 아닐 수 없다.

워크 해피, G기업

G기업은 무형의 서비스와 노하우를 사고 팔 수 있는 인터넷 플랫폼이다. 일종의 재능마켓인 셈이다. 이용자들은 마케팅, 디자인, 영상, 시까지도 제작을 의뢰, 구매할 수 있다. 이러한 G기업이 추구하는 기업모토는 ‘워크 해피’ 즉, 사람들이 보다 행복하게 일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직원들이 먼저 행복하게 일하고 성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G기업이 시도하고 있는 여러 제도들 중 35시간 근무제가 있다. 오전 10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한다. 보통 1인당 업무량이 많아 야근이 잦은 스타트업 기업에서는 보기 드문 제도다. 매출 감소나 성장세 둔화 등 유무형적 손실을 각오하고 도입한 제도였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근무시간이 단축되니 오히려 업무 집중도가 올라간 것이다. 회사의 성과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고 직원 만족도만 크게 올라갔다.

G기업 직원들의 애사심은 남다르다. 워크숍에 가면 종교집단이냐는 우스개가 들려올 정도다. 워라밸이 회사를 향한 자부심을 키워준 것이다.

◎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워라밸은 CEO의 말 한마디나 한시적인 시혜성 이벤트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 기업의 문화가 다르고 산업의 특성도 다르기에 일괄적인 기준을 제시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더욱 정부 주도가 아닌 기업 자체적인 각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맞춤 제도의 도입과 리더들의 솔선수범, 제도 정착을 위한 도구의 개발, 이후의 전사적인 확산이 일과 삶의 균형이 있는 일터로 가는 일련의 프로세스인 것이다.

비생산적인 장시간 노동은 기업의 성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방만하고 안일한 조직 문화 역시 직원들의 성취감과 애사심을 떨어뜨린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CEO의 진정성 있는 의지와 이에 동의하는 직원들이 주도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때 워라밸은 우리 사회에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