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일본의 기업지배구조 ‘우등생’으로 꼽혔던 도시바가 7년간 2248억 엔(약 2조 3629억 원)의 회계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발각됐다. 일본기업은 대부분 오너가 아닌 경영자가 주도하는 경영자 경영 체제다. 일본의 기업가들은 일본식 경영방식에 자부심을 느끼며 한국식 재벌 체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경영자 경영의 대표주자인 도시바가 무려 7년 동안, 그것도 역대 세 명의 사장들이 지속적으로 분식회계에 가담해온 것이다. 그 속사정이 궁금해진다.
도시바는 왜 회계조작을 했을까?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경영자들
도시바의 사장 임기는 대개 4년이다. 그런데 사장 퇴임 이후에도 회장·고문·상담역 등으로 회사에 남아 경영에 관여하는 원정(院政) 시스템이 있다. 회계부정이 시작된 시기에 사장을 지냈고 이번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받고 있는 니시다 아쓰토시는 10년간이나 권력의 중추에 있었다. 이처럼 장기간 원정을 하기 위해서는 차기 사장에 자기 사람을 심어야 한다. 대개 자신이 관여했던 사업부 후계자를 지명한다. 때문에 차기 사장은 선대 사장의 실패를 덮어두려고 한다. 사장 시절 업적이 나쁘거나 전략사업이 바뀌게 되면 다른 사업부 출신이 사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경영진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일본 재계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경제단체연합회(이하 경단련) 회장단 취임도 경영진을 이익지상주의에 빠지게 하는 유혹이다. 경단련 회장은 도요타, 신일본제철, 도시바 등 명문 기업 출신자들이 많다. 재계 대표가 되려면 경영자 시절의 업적이 좋아야 한다. 자연히 경영진은 자신의 업적을 부풀려 성공한 경영자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한다.
국책 사업과 밀접한 도시바
도시바는 정부와의 연결고리가 다른 기업보다 끈끈했다. 도시바의 사장 출신 중에는 도시바의 상담역 자리를 유지하면서 도쿄증권거래소 회장직을 역임한 경우도 있다. 이처럼 도시바가 일본정부와 밀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부 정책에 부합하는 사업에 열중했기 때문이다.
회계부정의 발단이 되기도 한 원자력 사업이 대표적인 예다. 도시바는 2006년 미국 원자력 발전회사 웨스팅하우스를 6600억 엔에 인수했다. 당시 일본 경제산업성은 ‘원자력 르네상스’라는 기치를 내걸고 원자력 발전 사업을 주력 수출산업으로 육성하려고 했다. 당시 니시다 사장은 2015년까지 원자력 발전 매출을 최대 3.5배 늘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원자력은 그렇게 장래가 유망한 사업이 아니었다. GE, 지멘스 등 세계적인 원자력 발전 기업들은 향후 원자력 사업 전망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고 경쟁사인 미쓰비시 중공업도 비싼 매물이라며 웨스팅하우스 인수를 포기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바는 정부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무모한 인수를 강행했다. 결국 도시바는 경영난에 빠졌고 이는 회계부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카리스마 경영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기업 시스템
일본 기업은 경영자 기업임에도 카리스마 경영자들이 많다. 권한이 사장에게 집중돼있고 의사결정도 톱다운 방식인 경우가 많다. 경영자의 업적이 화려할수록 이러한 경향은 강해진다.
도시바에서 회계부정이 시작된 2008년에 사장을 지낸 니시다도 그러한 경영자였다. 세계 최초로 노트북을 제품화하여 세계시장 점유율을 1위로 올린 인물이었다. 회계부정의 단초가 되었던 웨스팅하우스 인수를 주도한 것도 그다. 당시에는 샐러리맨답지 않게 리스크를 감수하며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CEO라고 정평이 나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한 경영자라도 외부 환경의 변화는 막아낼 수 없다. 리먼 사태와 동일본 대지진이 그것이다. 2008년 도시바는 리먼 쇼크로 2597억 엔의 손실을 봤다. 카리스마형 경영자에게는 뼈아픈 성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도시바는 1947억 엔의 세전이익을 냈다. 업계에서는 도시바의 V자형 반등을 극찬했으나, 이것은 회계부정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또한 엄청난 악재였다. 원자력 발전 사업 수요 자체가 급감한 것이다.
업적 부진을 감추기 위한 경영자들의 수완이 발동됐다. 각 사업부의 독립성을 강화한다며 사내 컴퍼니 제도를 도입하고, 각 컴퍼니의 수장이 경영의 최종 경영책임을 지게 한 것이다. 도시바의 경영자는 업적이 좋지 않은 사업부문장들에게 ‘도전’을 종용했다. 경영위기 극복을 위한 도시바의 ‘도전’ 문화는 어느 순간 회계부정을 해서라도 수치를 조작하라는 뜻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사장들은 아무도 자신이 직접 분식회계를 직접 명령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사업부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업부문장들과 임직원은 ‘도전’을 이어온 것이었다.
제도 결함과 윤리 결여의 사내 감사
왜 도시바의 조직 내 감사 기능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을까? 왜 직원들은 상사의 지시에 순종해 분식회계에 가담했을까? 여기에는 경영진에 거역할 수 없도록 하는 인사와 업적평가 제도가 있었다.
도시바에도 사내 감사를 위한 조직으로 ‘사내 감사부’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장래 부문장이나 사장이 되기 위한 요직이었다. 그러다 보니 감사부 직원들 중 회계감사 전문가는 드물었다. 설령 부정을 알아도 이를 지적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출세에 지장을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도시바 분식회계 사건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내부고발에 의해서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회계조작이 7년이나 묵인됐다는 것은 제대로 된 내부고발 시스템의 부재를 의미한다. 물론 ‘배신자’ 낙인에 대한 공포는 이해할 수 있다. 자유롭다는 미국에서도 내부고발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불이익을 받지 않고 제3자 기관에 통보할 수 있는 감시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도시바는 우리 기업에 무엇을 말하는가?
도시바는 도요타 자동차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우량기업이었다. 그랬던 도시바가 왜 이런 분식회계를 저질렀을까? 근본적인 배경은 전기·전자 사업에서 일본기업의 경쟁력 약화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도시바의 경영진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는 회계부정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모든 기업이 도시바처럼 한 것은 아니다. 히타치는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인 7천 억 엔 이상의 손실을 기록한 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당시 이익이 나고 있던 HDD 사업조차도 추진 중인 사업전략과 배치된다며 매각할 정도였다. 그 결과, 히타치는 철도사업 등 주력사업에 집중하여 회생에 성공했다.
경영진과 직원 사이의 소통 부재, 내부고발의 어려움, 기업의 경영전략보다 정부 정책에 대한 우선 협조 등은 비단 도시바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한국기업에서도 익숙한 요소들이다. 우리의 내부고발 시스템은 과연 살아있는지, 사내 경영윤리가 공허한 슬로건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보아야 할 일이다.
참고 자료 – 『도시바 회계부정, 아베의 묵인… 일본, 지배구조에 근본적인 회의를 던지다』 DBR에서 발췌 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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