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돋보기
젠더 감수성과 경영리스크
“내가 너한테 평가받으러 온 줄 알아?”

최근 방영된 모 드라마 속 대사다. 극중 중년 여성은 어려 보인다며 자신의 외모를 칭찬하는 젊은 남성 호스트에게 면박을 준다. 급기야 기분이 상했다며 남성의 얼굴에 술까지 뿌린다. 이 장면이 불편하다면 등장인물의 성별과 나이를 바꾸어보자. 영화나 드라마에서 심심찮게 나오던 장면이 된다. 바야흐로 젠더 이슈는 TV 드라마에서 정면으로 다룰 만큼 보편적인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시장 상황에서 기업은 높아진 여성의 구매력과 다양해진 남성의 요구를 세밀하고 정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막대한 투자를 한 신제품이나 광고가 매출로 이어지기는커녕 반감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젠더 감수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안정적인 비즈니스 운영이 어려워진 것이다.
이번 사례돋보기에서는 젠더 감수성이 결여되거나 부족하여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은 국내외 기업 사례들을 제품·서비스와 광고 분야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품·서비스에서 드러나는 기업의 젠더 감수성
샘플이미지 젠더 감수성은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일상생활 전반의 성 차별적 요소를 감지해내는 민감성을 의미한다. 트렌드를 읽는 기민함과 문화적 맥락을 꿰뚫는 통찰력, 섬세한 공감능력이 동시에 요구된다. 경영 일선에서는 이러한 젠더 감수성을 비즈니스에 적용하는 데 실패해 비난을 받고, 비즈니스 상의 타격을 받은 경우들이 있다.
젠더 감수성이 결여된 게임 콘텐츠 넥슨은 서든어택, 메이플스토리, 바람의 나라 등 다수의 히트작을 출시한 국내 최대 게임회사다. 2016년 넥슨은 서든어택2를 출시했다. 1인칭 관점의 총싸움 게임으로 PC방 점유율 순위 106주 연속 1위였던 서든어택의 후속작이었다. 개발비 300억 원의 기대작이었던 서든어택2는 출시 직후부터 선정성 논란에 휘말렸다. 극중 캐릭터들은 전투 중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성 캐릭터만 유독 작위적이고 선정적인 자세를 취한 채 쓰러진다. 일부 유저들은 게임을 즐기기보다 사망한 여성 캐릭터들을 찾아다닐 지경에 이르렀다. 넥슨 측은 지도와 지형에 따라 쓰러진 자세가 설정되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게임의 콘셉트를 보면 여성의 성을 상품화해 이윤을 추구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남성이 아닌 여성 캐릭터를 선택할 때 여러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 유저들의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눈요깃감’이 되는 것이다. 비난이 이어지자 넥슨은 두 여성 캐릭터를 삭제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서든어택2는 출시 23일 만에 서비스를 중단했다. 갖은 논란이 빗발치는 가운데 경쟁작인 블리자드의 오버워치에 밀린 게 결정타였다. 서든어택2의 실패로 개발사 넥슨지티는 200억 원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300억 원짜리 대작이 허망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샘플이미지 제품 성별 분류 폐지 디즈니는 마블 스튜디오, 픽사, 디즈니 채널 등을 보유한 세계 최대의 미디어그룹이다. 전 세계 수많은 어린이들이 디즈니의 만화영화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성장한다. 2015년부터 디즈니 매장은 할로윈 복장에 새겨진 ‘7세 남아’, ‘6세 여아’ 등의 설명 대신 성별 관계없이 7세 아동용으로 표기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이 성별이 구분된 장난감을 소비하면서 경직된 성 역할을 강요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분홍색이나 공주 캐릭터의 장난감은 무조건 여아용, 파란색이나 영웅 캐릭터의 장난감은 무조건 남아용으로 정해놓는 것이 성적 고정관념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미국의 대형 유통기업 아마존 또한 성별 기반의 상품 분류방식을 폐지했다.
미국의 유통업체들이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의 어느 한 여성으로부터 시작됐다. ‘여아용 조립세트’라고 표시된 장난감의 사진을 ‘이런 일 하지 말자’는 메시지와 함께 SNS에 올린 것이다. 해당 글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확산되었고 디즈니를 비롯해 대형 유통업체들이 이러한 소비자들의 요구에 화답했다. 젠더 감수성에 대한 대중적 요구와 이에 신속하게 대응한 기업의 대처가 돋보이는 사례다.
기업 광고에서의 젠더 감수성 결여 사례
샘플이미지 광고는 한정된 시간 안에 제품에 대한 호감과 구매욕을 일으켜야 한다. 무심한 소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경쟁도 치열하다. 그러다 보니 젠더 감수성에 대한 섬세한 고려 없이 자극적인 방향으로만 제작되어 소비자들의 비난을 산 경우들이 있다.
성차별적 광고 국내 최대 통신업체 SK텔레콤은 지난해 새 요금제인 T플랜 광고 문구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해당 요금제는 가족끼리 스마트폰 데이터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데, 광고는 부모의 관점에서 자식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문제의 광고 문구는 다음과 같다.
“아들, 어디 가서 데이터 굶지 마.”
“딸아, 너는 데이터 달라고 할 때만 전화하더라.”
이와 같은 광고가 알려지자 소비자들은 SK텔레콤의 성차별적 광고를 비판하는 글을 SNS로 공유했다. SK텔레콤의 공식 계정에도 항의했다. 아들은 혹여나 밥을 굶을까 안쓰러운 존재로, 딸은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SK텔레콤은 자연스러운 가족의 풍경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취지와 달리 오해를 받았다며 딸에 대한 광고를 전격 철회했다. 전국 대리점에서도 문제의 광고를 내리도록 조치했다. 고심해서 돈을 들여 제작했을 전국 단위의 광고가 오히려 소비자들의 불쾌함과 불매운동을 촉발시킨 사례다.
성적 고정관념을 부추기는 광고 공차코리아는 글로벌 티 음료 전문 브랜드로 당도, 얼음량, 토핑 등을 개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공차코리아는 지난 2013년 성차별적 요소가 담긴 지하철 광고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당시 공차의 지하철 광고에는 어항 속 남성의 얼굴을 한 물고기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의 사진과 함께 ‘영화용 친구, 식사용 오빠, 수다용 동생, 쇼핑용 친구, 음주용 오빠! 어장관리’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여성이 남성을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 지하철 광고는 SNS상에서 확산되며 소비자들의 규탄을 받았다. 공차는 해당 광고를 즉각 중단했다.
그러나 2016년 공차코리아는 같은 논란에 휩싸였다. 매장을 찾은 커플 중 남성이 “어차피 계산은 내가 하는데...” 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광고를 배포한 것이다. 누리꾼들의 비판이 이어지자 공차코리아는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제휴사의 광고라며 이 또한 중단 조치했다.
광고는 대중의 호감을 사기 위해 제작된다. 경우에 따라 천문학적인 비용이 투입되기도 한다. 성차별적인 상황을 소비자들이 재미있어 할 거라는 잘못된 젠더 감수성이 적지 않은 비용이 투입되었을 프로모션을 실패하게 만든 것이다. 진화하는 소비자들의 요구사항... 젠더 감수성
샘플이미지 “해변용 몸매를 준비하였는가?(ARE YOU BEACH BODY READY?)”
다이어트 보충제 판매 업체가 영국 런던의 지하철역에 내건 광고 문구다. 규정을 위반하지도 않은 이 광고는 여성단체와 영국 네티즌들로부터 극렬한 비난을 받았다. 400여 명 이상이 모여 항의 집회를 열었을 정도이다. 광고모델처럼 늘씬한 여성이나 근육질의 남성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해변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건이 심각해지자 런던 시장까지 나서서 비현실적인 몸매를 강요하는 광고는 대중교통에서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문제의 광고는 지하철에서 퇴출됐다. 이처럼 소비자들은 기업에 젠더 감수성을 가지길 요구하고 있다. 여성들만의 요구는 아니다. 남성들 또한 성적 고정관념을 강요하는 광고에 불만을 토로한다. 모든 남성이 전통적인 성역할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품의 품질이 상향평준화된 오늘날, 소비자들은 기능이 아닌 가치를 구매한다. 기업은 좋든 싫든 트랜드에 기민하게 반응해 제품과 광고에 반영해야 한다.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두려워 무색무취의 메시지를 내면 광고효과가 없고, 시선을 사로잡는 것에만 매몰된다면 도리어 비난을 받기 쉽다. 이윤까지 생각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이해와 공감, 배려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젠더 감수성에 대한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성별이 아니라 누구든 한 명의 사람으로 바라보면 될 일이니까 말이다.
* 자세한 참고 리스트는 국민권익위원회 홈페이지 내 한글파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