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관계는 갑과 을로 불리는 계약 당사자들의 계약관계를 의미합니다. 흔히 지위가 높은 이가 갑, 낮은 이가 을로 불리면서, 갑을관계는 비대칭적인 권력의 상하관계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갑이 부당하거나 불공평한 일을 을에게 요구하는 것을 갑질이라 부르고 있고, 갑을관계는 갑질의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며 사용될 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갑을관계의 문제들은 기업의 안과 밖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직원에게 진상짓을 하는 고객, 부하직원에게 과도한 지시를 하는 직장상사, 하청기업에게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하는 원청기업, 중소기업의 기술을 가로채는 대기업 등이 바로 갑을관계 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갑질 사례입니다.
부당한 갑질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을의 외부 대안이 크게 줄었기 때문입니다. 갑질을 당하는 을이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갑은 갑질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갑질의 문제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소기업 노동자는 대기업 노동자 임금의 90% 이상을 받았지만 지금은 대략 60% 정도를 받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대략 절반 정도를 받습니다. 갑질을 거부하는 경우 소득의 큰 감소를 경험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갑질을 견뎌내야만 합니다. 기업들 사이의 갑질 원인도 비슷합니다. 전체 중소기업의 절반 가까이가 독립기업이 아닌 하청기업으로 존재하고, 원청기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납품단가를 후려치거나, 대금결제를 미루고, 기술을 빼앗겨도 달리 저항할 방법이 없습니다.
갑을관계가 낳는 문제가 부당하고 불공정하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투자와 거래를 위축시키는 비효율성을 낳습니다. 하청기업이 연구개발을 통해 부품 생산 단가를 낮추면, 원청기업이 단가 인하를 요구한다고 합시다. 이런 식의 갑질을 예상하는 하청기업은 더 이상 연구개발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은 이것을 두고 홀드업 문제(Hold-up problem)라고 부릅니다.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의 업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단기적 이득을 위해서 과도한 업무량을 요구하지만, 장기적으로 직원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업무가 사라집니다.
홀드업 문제라는 갑질을 극복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서 경제학자들은 신뢰 게임 실험을 하였습니다. 실험참가자들을 갑과 을로 나누어, 을에게 100달러를 줍니다. 을은 주어진 돈에서 얼마를 갑에게 건넵니다. 이것을 을의 노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갑은 건네받은 돈을 통해 세 배의 수익을 얻는다고 합시다. 예를 들어, 을이 100달러 모두를 갑에게 건네면, 갑은 이를 이용해서 300달러를 벌 수 있습니다. 게임의 마지막 단계는 갑이 번 돈의 일부를 을에게 자발적으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만약 갑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한다면, 갑은 한 푼도 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갑질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합리적으로 예상하는 을은 돈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을의 역할을 하는 이들은 갑질을 염려하여 약간의 돈만 건네주고, 갑의 역할을 하는 이들은 건네받은 돈보다 조금 적게 돌려주는 갑질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게임을 조금 바꾸어, 을이 갑을 처벌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봅니다. 자신의 돈 10달러를 써서 상대방의 돈 20달러를 없앨 수 있습니다. 을이 이기적인 존재라면 응징을 선택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서 복수를 하고 싶다 해도, 처벌에 따른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험 결과, 갑이 수익을 공평하게 나누지 않을 때, 을은 복수를 선택합니다. 공평함에 대한 요구가 이기심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결국 을들의 복수를 예상하는 대다수의 갑들은 수익의 공평한 분배를 선택합니다. 역시 이를 예상하는 을들은 기꺼이 가진 돈의 대부분을 갑들에게 건네줍니다. 이처럼 부당한 갑질에 대해서 처벌할 수 있는 기회만 을에게 주어져도, 갑을관계는 생산적인 파트너십으로 변화합니다.
갑을관계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윤리 경영을 추구하는 기업들은 갑을관계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경영자는 을의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처벌 권한을 부여하는데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갑과 을 사이의 권력의 비대칭을 줄이려는 노력은 이 시대가 요청하는 긴급한 기업 윤리입니다. 갑을관계로 인한 비효율성을 줄이는 윤리 경영은 기업의 이윤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