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광고는 한편의 영화 같다. 15초 내외의 짧은 시간 안에 눈가가 촉촉해지는 감동을 전하기도 하고 고착화된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타파하기도 한다. 초 단위로 비용이 부과되는 광고에 서정적이고 간접적인 콘텐츠를 집어넣는 이유는, 단연 기업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다. 기업의 이미지에서 비롯되는 무형의 느낌들이 소비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기조 속에서 고비용의 광고 없이도 전통의 강자로 자리를 지켜온 기업들이 있다. E가구와 S악기가 그 중 하나다. 비록 대기업은 아니지만 가구가 필요할 때 항상 후보군에 오르는 E가구,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그 앞에 앉아 봤을 S악기의 피아노. 이 두 기업은 큰 광고 없이도 국민들에게 깊게 각인되어 있다. 글로벌 공룡 가구업체들의 한국 진출과 중국발 저가 악기의 침투 속에서 E가구와 S악기는 어떻게 살아남았고, 또 더욱 성장할 수 있었을까.
모든 상품은 제조, 유통, 판매의 과정을 거친다. 품질과 디자인, 최신 유행을 모두 잡아야 하는 제조와 상품을 흠집 없이 빠르게 배송해야 하는 유통 그리고 고객에게 홍보하고 영업해 수익을 내야 하는 판매, 이 중 하나만 잘 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기업들은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문제는 소위 ‘갑질 사건’의 대부분이 이러한 프랜차이즈 형태의 기업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생업을 정리할 수 없는 가맹점주들의 사정을 악용해 본사에 불복종하는 가맹점에는 좋은 상품을 보내주지 않는다던가, 팔리지 않는 상품을 억지로 떠안기는 식이다. 물론 시스템을 가진 모든 기업이 이러한 갑질을 일삼는 것은 아니다. 바람직한 협력관계를 구축해 더욱 성장한 곳도 있다.
2018년 1월, E가구는 <2017 우수디자인(GD) 상품>으로 선정됐다. 무려 18년 연속이다. E가구로서는 맡겨 놓은 상을 찾아가는 수준이다. 모든 산업디자인이 그렇듯, 가구디자인 역시 실용성과 예술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한다. 거기에 1인 가구의 증가와 미니멀리즘 등 시시각각 변하는 트렌드에도 앞서 나가야한다. 여기에 단가까지 맞춰야 하니, 듣기만 해도 숨이 가쁘다. 이런 디자인 분야에서 18년 넘게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이다. 이토록 강력한 E가구의 제품 경쟁력을 견인하고 있는 것은 바로 대리점주들과의 파트너십이다. E가구는 직접 대리점주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주선하여 제품 품평회를 가진다. 소비자들을 최전선에서 만나는 대리점주들의 의견을 디자인에 적극 반영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E가구의 품평회에서 대리점주들은 저마다 수십페이지의 평가서를 손에 들고 다니며 디자이너들의 설명을 듣고 가격대, 기능, 디자인 등을 꼼꼼하게 체크한다. 그리고 E가구는 점주들의 평가를 겸허히 수용한다. 좋은 물건과 구매하는 물건의 기준은 사뭇 다르다. 만드는 이에겐 최선일지 모르나 사는 이에게는 딱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소비자와 기업 간 소통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디자이너와 일반 고객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E가구는 이러한 간극을 메우는 역할을 대리점주들에게 맡겼다. 대리점들이야말로 E가구의 소비자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E가구가 글로벌 대기업의 침투에서도 소비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S악기는 피아노로 유명한 악기 제조사다. 그러나 저출산 기조와 아파트형 주거문화의 확산으로 국내 피아노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고, S악기는 중국 시장에 도전하였다. S악기는 2017년 중국에서 53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일본 야마하 등에 이어 중국 시장 4위의 성적을 5년 째 유지하고 있다. S악기가 중국 시장 개척에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일선 판매 조직과의 적극적인 소통에 있었다. 중국시장 개척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물건부터 받아가는 관행 때문에 돈을 떼여 상품을 팔고도 손해만 보는 상황이었다. S악기는 철칙을 세웠다. ‘외상거래는 하지 않는다, 대신 최선을 다해 대리점주와 딜러의 판매 활동을 지원하자.’였다. 대리점에 피아노 조율사를 파견하고, 영업에 도움이 되는 세미나와 신제품 설명회를 지속해서 개최했다. 단합을 위해 S악기 딜러 패밀리 파티를 열기도 했다. 대리점주나 딜러가 본연의 업무를 하는데 왜 돈을 들여가며 지원해줘야 하나 싶을 수 있다. 오히려 수치 위주의 평가 제도를 도입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편이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판매는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돈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진심으로 본사를 좋아하게 되고, 소속감을 가지게 될 때, 딜러와 대리점주들은 고객에게 더욱 진심이 된다. S악기는 그걸 알았고, 실천한 것이다.
기업은 여러 종류의 파트너십을 가진다. 하지만 '협력업체'와 '을'이란 단어는 그 사전적 의미에 더해 부당한 요구도 참아야만 하는 약자의 입장도 함의하고 있다. 씁쓸한 현실이다. 희망적인 것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해보려는 자구의 노력들이 곳곳에서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움직인다는 면에서 고무적이다. 이처럼 진정한 협력관계 구축을 위해서는 실천해야 할 일련의 과정이 있다. 비전을 세우고, 제도를 만들고 문화로 확산시켜 생활화해야 한다. 각 단계 별로 주목할 만한 사례를 찾아보았다.
E커피는 프랜차이즈 회사다. 가맹점을 모집하고 본사의 노하우를 공유해준다. 그리고 상호 사용료의 성격을 띠는 로열티를 포함, 카페 운영에 필요한 식재료와 인테리어 등을 제공하며 수익을 얻는다. 최근 정부는 시간당 법정 최저임금을 대폭 끌어올렸다. 직원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정책이지만, 자영업자들에게는 걱정스러운 일이다. 매출은 그대로인데 비용만 늘어난 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E커피는 특별한 방침을 발표했다. 원부재료 일부 품목의 매장 공급가를 인하한 것이다. 인건비 상승분에 대한 부담을 가맹점주들과 나누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E커피의 결단은 고유의 경영철학(정正, 애愛, 락樂)에서 나온다. 기본을 지키는 정직한 기업, 사람을 사랑하는 따스한 기업, 신나고 행복한 즐거운 기업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실제로 E커피는 기업의 핵심가치로 가맹점주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경영은 의사결정의 연속이고, 그 판단의 기준은 철학에서 나온다. 경영철학부터 협력과 동행에의 의지가 필요한 이유다.
I사는 네트워크 관련 솔루션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IT 전문 기업이다. 특히 조달 쪽에 경쟁력이 있어 조달청에서 운영하는 국가종합전자조달시스템, 나라장터 시장점유율이 60%가 넘는다. I사가 계속해서 성장 일변도를 달려온 것은 아니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글로벌 외환위기가 터졌을 땐 몇 십억 원 규모의 환차손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I사가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선택한 방식은 공유와 소통이었다. 순익의 10%를 인센티브로 나눠준다는 방침을 공표하였고 그 이후 직원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업무에 임했다. 또한 공동대표제를 도입하여 장기 근속한 직원들에게 차기 대표에 대한 기대감도 심어줬다. 이제 일한 만큼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I사는 회사 밖에서도 노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중소기업의 경우, 퇴사한 직원이 경쟁사의 사장이 되는 경우가 있다. I사는 이들을 협력업체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퇴사자들은 더 좋은 조건의 물건을 납품해오는 등 I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협력업체와 함께 가려고 노력하는 I사는 최근 5년 동안 연 15%씩 성장했다. 독점하지 않고 직원 및 협력업체와 나누는 활동들이 오히려 성장에 기여한 것이다.
C사는 정수기 사업을 메인으로 하는 생활건강 관리 업체다. 현재 소통과 참여를 중시하는 수평적인 기업문화 조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평적인 기업문화는 업계에 암암리에 퍼져있는 갑을문화를 타파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지나친 위계질서는 협력업체 사장을 ‘을’로 대하는 일부 직원들의 잘못된 관행에 일조하기 때문이다. C사의 경우 새로운 호칭 제도를 도입했다. 직급과 직위에 상관없이 모두가 서로를 '-님'이라고 부른다. 직위고하에 상관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는다면, 외부와의 건강한 파트너십 구축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기업문화는 조직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결정한다. 기업문화에 따라 스타트업처럼 역동적인 조직이 될 수도 있고, 상명하복의 일사불란한 조직이 될 수도 있다. 구성원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문화이기 때문이다. 갑을문화 타파에 수평적인 기업문화 조성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갑질,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한 행위를 통칭하는 말. 한 외신에서는 마땅한 영단어를 찾지 못해 우리 발음 그대로 Gapjil이라 표기해 소개했다. 이것이 부당한 일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윤리의식 고양은 물론 기업 경쟁력 고취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갑질을 하는 '갑'은 자신의 부족함을 모른 채 도태될 것이고, 갑질을 당하는 '을'은 이 상황을 벗어나는 데에만 자신의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갑에게도, 을에게도 건강한 파트너십은 지향해야 할 목표다. 갑의 위치에 서게 된 기업들이, 그만큼 성장할 수 있게 뒷받침해 준 협력업체들에게 좀 더 나은 파트너십을 제안해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