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골목에 두 곳의 빵집이 있다고 해보자. 최근에 생긴 B빵집은 인테리어도 세련되고 매장 규모도 크다. 이벤트라며 무료로 빵을 나눠주기도 한다. 오래된 A빵집 또한 시식 서비스를 시작하고 쿠폰도 나눠주지만 공격적으로 물량 공세를 펼치는 B빵집을 당해낼 재간은 없다. 골목 주민들은 비슷한 가격에 무료 서비스까지 주는 B빵집으로 몰렸다. 결국 A빵집은 폐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B빵집은 가격을 올렸다. 그동안 뿌린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경쟁자가 없어지자 빵의 품질도 점점 떨어졌다. 결국 주민들은 비싼 값에 맛없는 빵을 먹게 된 것이다.
만일 두 곳의 빵집이 서로 공존하며 포용적 성장을 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A빵집은 식사대용 빵에 집중하고 B빵집은 케이크 같은 디저트를 전문으로 했다면? 두 곳 모두 각자의 시장을 확보하고 주민 선택의 폭도 넓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포용적 성장은 양보가 아니라 공생의 문제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이득이라는 것이다. 이번 사례 돋보기에서는 포용적 성장의 성공 사례와 관련 정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독일은 유럽 최고 수준의 고용률과 세계 1위의 경상수지를 자랑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인구 8천만 명의 크지 않은 나라가 이토록 견고한 경제 구조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지멘스와 같은 대기업의 공으로 보기는 어렵다.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 리스트에서 독일 대기업들의 성과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평균 이하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영국, 중국보다 대기업 숫자도 적다. 그럼에도 독일은 재정위기에 빠진 유럽연합의 유일한 구원투수다. 이러한 독일경제의 초석에는 히든 챔피언이라 불리는 강소기업이 있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조직의 문제점은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조직은 점차 더 큰 폭력을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커다란 리스크로 돌아오게 된다.
히든챔피언은 세계시장 점유율 1~3위 또는 대륙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업이면서 매출액이 40억 달러 이하인 우량기업을 말한다. 주로 기계, 전자, 화학 등 제조업종에 분포되어 있으며 핵심적인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때문에 대기업 등의 원청업체에 정당한 납품단가를 요구하고 협상할 수 있다. 언제 공급선이 잘릴지 몰라 쩔쩔 매는 일반 납품업체와는 전혀 다른 입장인 것이다.
히든챔피언처럼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안정적인 매출이 확보되었다면 종업원의 임금과 복지 수준도 높아질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이라면 구직자들도 대기업 입사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어진다. 자연스럽게 양극화와 실업 문제가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우수한 인재 유입은 기업 경쟁력 고취로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성장의 발판이 된다. 자연스럽게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강소기업의 가치는 경제위기에서 더 빛난다. 전 세계 히든챔피언의 47.8%를 보유한 독일경제의 안정성이 이를 증명한다. 실제로 2008년 글로벌 외환위기를 가장 빨리 극복한 독일은, 지금도 흔들리는 유럽 경제를 홀로 견인하고 있다. 소수의 대기업이 중심이 된 국가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대기업의 주요 비즈니스가 위태로우면 국가 전체가 흔들려버리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무너지면 납품업체들까지 연쇄도산하며 지역경제가 통으로 마비되기도 한다. 히든챔피언 양성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작지만 강한 강소기업들이야말로 경제의 버팀목이자 반석인 것이다.
독일이 이토록 많은 강소기업을 배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포용적 성장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합의가 있었다. 2009년 추진한 ‘숏타임 레이보’ 프로그램이 좋은 예다. 당시 전 세계는 미국 발 경제위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독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은 대량 해고를 막기 위해 노동시간을 단축했다. 이로 인해 감축된 임금은 정부가 보상했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지만 6천 여 기업들의 회생을 돕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기업인, 근로자, 정치인 등 이해관계자들의 빠른 합의가 없이는 불가능한 프로그램이었다. 덕분에 독일은 유럽의 그 어떤 국가들보다 빠르게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히든챔피언 양성비결은 ‘평생학습 지원제도’다. 독일에서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 독일의 기업은 1년에 최소 1주 이상을 학습을 위해 쓸 수 있도록 보장하는데, 비용은 정부에서 지원하고 있다. 한 번의 시험 성적이나 어린 시절의 선택으로 인생 전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적성을 찾아갈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구축돼 있는 것이다. 여기서 히든챔피언들의 역할이 또 한 번 빛난다. 히든챔피언들은 대부분 가족기업으로, 지역사회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지역사회와 협력해 산학연계 직업훈련 체계를 구축, 지역 일자리 창출에도 적극 공헌하고 있다. 독일경제의 견고함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 정부, 기업이 협력한 포용적 성장 활동의 결과물인 것이다.
포용적 성장은 대기업의 일방적인 양보가 아니다. 지속가능한 경제 생태계를 위해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대기업 또한 협력사의 경쟁력이 떨어지면 양질의 품질을 생산하기 어렵다. 중소기업과의 상생은 대기업의 장기 성장 전략에도 필수적인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포용적 성장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형 포용적 성장 전략은 동반 성장이라고 불리며, 보통 ‘판로 구축, 기술력 강화, 인력 양성’ 차원으로 구분되어 진다.
노란색 포장이 인상적인 T사의 PB(Private Brand, 자체브랜드)는 상당수의 충성 고객을 가지고 있다. 상품의 디자인, 판매, 마케팅은 T사가 책임지고 중소기업은 상품 생산에만 집중하는 시스템이다. 즉, T사의 플랫폼 파워와 중소기업의 기술 경쟁력이 결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T사의 PB 매출은 2015년 230억 원, 2016년 1900억 원, 2017년 2900억으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T사라는 거대유통사가 보장하는 고품질의 저렴한 상품들을 구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T사는 PB에 참여하는 중소기업의 해외 판로 지원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2016년 중국, 베트남, 몽골 등 총 8개 국가에 43억 원 규모의 PB 상품을 수출한 T사는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수출 국가를 적극 확대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T사를 찾는 이유는, 원하는 상품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상품을 제공하는 생산업체 없이는 T사의 성장도 지속가능할 수 없다. T사 PB의 성장은 포용적 성장이 중소기업과 유통사와의 오랜 갈등을 해결할 솔루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S기업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철강기업이다. 1968년 설립된 이후 고도 성장기 한국경제의 대표 주자였던 기업이기도 하다. 그만큼 많은 협력사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S기업은 협력사들과 동반성장을 위해 기술을 지원하고 있다. S기업의 테크노파트너십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협력사는 S기업으로부터 조업 데이터와 시험장비를 제공받아 지속적으로 품질을 개선하여 업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했다. 덕분에 일본의 선진 철강사에까지 제품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임원동반성장지원단 프로그램을 통해 S기업 그룹 임원들의 업무경험과 전문지식을 활용하는 협력사도 있다. 이 회사는 S기업으로부터 연구개발과 재료실험을 지원받았고, 신규 발주처와 최종 수요자에 대한 프로모션도 공동으로 전개했다. 그 결과 콘크리트를 대체할 정도로 강력한 파형강판을 개발하는데 성공, 국내외 각종 건설 프로젝트에 납품하게 되었다.
기업은 제품 경쟁력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제조기업에 있어 경쟁력은 곧 기술력을 말한다. S기업은 기술 경쟁력 고취를 위한 각종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해 협력사들의 성장을 도왔다. 이는 S기업의 성장에도 긍정적인 일이다. 협력사들의 수준은 곧 S기업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I기업은 전 세계 소프트웨어 산업을 주도하는 기업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윈도우라고 불리는 해당 기업의 운영체제를 사용하고 있다. I기업은 이러한 자사의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중소기업 인력의 교육, 연수, 훈련 등의 역량 강화를 지원하는 ‘MS 파트너 네트워크(MPN)’ 구축이 그 중 하나다. I기업은 협력사들에게 기술 교육뿐 아니라 비즈니스 네트워크 및 협력 체계 구축, 업계 주요 정보 교류 등 다각도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I기업이 협력사들의 경쟁력 강화에 힘쓰는 것은 그것이 결국 자사의 매출 확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I기업에서 제공하는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경험한 기업들은 앞으로도 지속해서 I기업의 제품을 구입할 것이다. 결국 I기업의 MS파트너 교육은 자사의 제품을 쓰는 협력사들과 함께 성장하기 위한 포용적 성장의 일환인 것이다.
포용적 성장은 협력하여 함께 발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수의 기업에 기회를 몰아준 후 관련된 중소기업들에게도 성과가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낙수효과와는 본질부터 다르다. 국내 전체 사업체 가운데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99%에 이른다. 이것은 내수시장 소비자 대부분이 중소기업 재직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잘 나가는 대기업이라 해도 소비자 없이는 버틸 수 없다. 해외시장 역시 본국의 소비자가 외면하는 기업의 제품을 언제까지나 사주지 않는다. 이것이 포용적 성장으로 나아가야 하는 절실하고도 근본적인 이유다.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는 포용적 성장만이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해결책인 것이다.